도씨(都氏)의 선세는 도계(都稽)라는 분에서 나왔으며, 계(稽)라는 분은 곧 한무제조(漢武帝朝, 기원전 159~89) 때 사람이다. 한(漢)나라 원봉원년(元封元年) 계묘(癸卯, 기원전 110)에 남월(南越)의 상신 려가(呂嘉)가 반란을 일으킴에 이를 사로잡은 공으로 임채후(臨蔡侯)에 봉(封)하여졌다. 그 후손인 휘조(諱祖)에 이르러 한(漢)나라 성제(成帝)의 홍가년대(鴻嘉年代, 기원전 20~17)에 장안(長安, 한(漢)의 서울)으로부터 고구려에 오시어 유리왕(瑠璃王, 서기 기원전 19~18)을 도왔으며, 후손으로 휘미(諱彌)는 한(漢)나라 환제(桓帝)의 연희시대(延熹時代, 서기 158~166)에 백제(百濟)에 오시어 벼슬을 하신 사실이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도성(都姓)은 그때부터 더욱 두드러졌는데, 그 후 휘진(諱陳)은 고려(高麗)의 정승(政丞)으로서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封)해졌고 휘순(諱順)은 전리상서(典理尙書)로서 아들에 휘충박(諱忠朴) 혹은 생주(生柱)가 있었으니 성주(星州)․달성(達城)의 양보(兩譜)를 참고하여 보면 이는 한 사람으로서 두 휘(諱)를 함께 칭한 것 같다. 상서공(尙書公, 휘충박(諱忠朴))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휘유도(諱有道)와 휘유덕(諱有德)이다. 휘유도(諱有道)는 관(官)이 전서(典書)에 이르렀는데 곧 달성(達城)․팔거도씨(八莒都氏)의 시조이다. 휘유덕(諱有德)은 명경진사(明經進士)로서 증종부판서성산군(贈宗簿判書星山君)이며 성주(星州)․단성(丹城)․운산(運山)․노성(魯城) 양호남(兩湖南) 도씨(都氏)의 시조이다.


그 후로 양 파의 자손이 삼남열읍(三南列邑)에 분거(分居)하면서 명현(名賢)과 석사(碩士)가 대를 이어 끊이지 않았으니 혹은 청절(淸節)과 학행(學行)으로 일세를 파복(播馥)하기도 하였고, 혹은 문장(文章)과 재덕(才德)으로 청구(靑丘, 우리나라)에 비영(蜚英)한 분이 그 수를 손꼽아 헤아릴 수 없다. 굳이 그중에 현저한 분을 들어 말하자면 고려말(高麗末)에 교리공(校理公) 원흥(元興)은 시문(詩文)으로써 세상을 울렸으니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와 여주(驪州)의 청심루(淸心樓)에 제영(題咏)한 바는 지금도 회자(膾炙)되며, 원수공(元帥公) 흥(興), 지평공(持平公) 간(衎), 부사공(府使公) 희경(希慶) 같은 분은 모두 훈열(勳烈)이 일세에 드러났으나 세대가 이미 누락되어 있고 유예(遺裔, 그 子孫(자손))가 미상(未詳)이라 보중(譜中)에 갖추어 적지 못하니 한탄스러움을 이를 데 없다.


고려말(高麗末)과 조선 이래로 달성파(達城派)를 말할 것 같으면 예빈공(禮賓公) 언린(彦麟), 우후공(虞侯公) 흠조(欽祖)께서 처음 달성(達城)으로 옮겨 살았다. 교리공(校理公) 하(夏)같은 분은 문장(文章)과 능시(能詩)로써 이름이 중화(中華)에까지 소문이 났으며, 우윤공(右尹公) 원결(元結), 참판공(參判公) 원량(元亮) 같은 분은 모두 조정(朝廷)에 등현(登顯)하였다. 양직공(養直公) 성유(聖兪), 서재공(鋤齋公) 여유(汝兪), 낙음공(洛陰公) 경유(慶兪) 같은 분은 한강정선생(寒岡鄭先生)의 문하에서 형설의 공을 세웠고 효우와 학행이 세상에 추중되었으며, 지암공(止巖公) 신수(愼修), 휘헌공(撝軒公) 신여(愼與)는 문장과 행의(行誼)를 고루 갖추어 이름을 당세에 떨쳤다. 죽헌공(竹軒公) 신징(愼徵)은 예류(禮琉)를 항진(抗陳)하여 국시(國是)를 대정(大正)하니 청명직절(淸明直節)이 조야(朝野)에 용동(聳動)하였다. 초계(草溪)를 말하자면 정랑공(正郞公) 여원(汝垣), 현감공(縣監公) 응종(應宗)은 문사(文詞)로써 이름을 세상에 크게 떨쳤다.


성산(星山. 오늘날 성주)을 말할 것 같으면 횡계공(橫溪公) 윤길(允吉)께서는 주서(州西, 팔거(八莒) 즉 현 칠곡향교 소재의 오성구기(吾姓舊基)에서 서쪽 또는 성주(星州) 서쪽)로 이거(移居)하시어 그 명철(名哲)로써 보신(保身)하시니 일세(一世)가 경복(景服)하는 바였다. 전객령공(典客令公) 안(安), 생원공(生員公) 이경(以敬) 같은 분은 문장(文章)으로 시세(蓍世)하였고 양진당공(養眞堂公) 맹녕(孟寧) 또한 덕행(德行)으로써 세인의 긍식(矜式‥세상의 표준 또는 모범)이 되었다. 두 아들이 있었으니 장자는 행정공(杏亭公) 형(衡)이고 다음은 운재공(雲齋公) 균(勻)인데 함께 한훤당김선생(寒暄堂金先生)의 문에 유하여 친히 학문[소학(小學)]의 지결(旨訣)에 대한 말씀을 받았다. 행정공(杏亭公)은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조정암(趙靜菴)과 도의(道義)로써 사귀었으며, 관직에 나아갔다가 이어서 조정암(趙靜庵)과 함께 연루되었고, 삭직(削職)된 후에는 물러나 임천(林泉)에 은거하면서 충효와 학문으로 세상을 위하니, 종사(宗師)로 받들어져 천곡현사(川谷賢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운재공(雲齋公)은 문장(文章)이 굉박(宏博)하고 학문(學問)이 순독(醇篤)하였으며, 로옥계(盧玉溪)․박용암(朴龍巖)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교유(交遊)하면서 서로 추중(推重)하니 당세의 사람들이 일가양난(一家兩難, 한 집안의 두 형제는 함부로 대할수 없는 큰 인물)이라 일컬었다. 그 후에 단성공(丹城公) 현보(鉉輔)․고부공(古阜公) 처형(處亨)․경력공(經歷公) 영하(永夏)․보성공(寶城公) 영성(永成) 같은 분은 청백(淸白)과 행의(行誼)를 구비(俱備)하여 그 이름을 남겼다. 단성(丹城)을 말할 것 같으면 저작공(著作公) 영강(永康)․저작공(著作公) 희녕(希寧) 같은 분은 재예(才藝)로써 세상을 울렸다.


양호(兩湖, 충청(忠淸)․전라(全羅))를 말할 것 같으면, 여조(麗朝)의 좌평공(佐平公) 응(膺)께서는 찬성공(贊成公, 휘길부(諱吉敷))의 자(子)로서 복소(覆巢, 복소무완란(覆巢無完卵))의 약어(畧語), 여기서는 여화(餘禍)를 겨우 면(免)하였으며, 이태조(李太祖)께서 등극(登極)하신 후(後)에는 한광무제(漢光武帝) 때의 자릉(子陵)의 뜻과 같이하여 여러 번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좌평공(佐平公)께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義)로써 끝내 부름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상(上, 이태조(李太祖))께서는 「청송당(靑松堂)」이란 호(號)를 내리시고 한림(翰林) 침기(沈綦)에게 명하여 그 아름다움을 기리어 제시(題詩)하기를,『내 청송(靑松)의 절개(節槪) 보기 사랑하여 곧은 줄기 손으로 어루만지네. 찬 뫼의 천 길 위에 우뚝하여 상설(霜雪)도 일찍이 꺾지를 못하였네.』하였으니, 그 절의(節義)를 고상(高尙)하다 아니 하겠는가! 그 후로 직장공(直長公) 사면(思勉)·맹산공(孟山公) 경손(慶孫)·고산공(高山公) 영하(永夏)·좌랑공(佐郞公) 철벽(哲壁)·현감공(縣監公) 응서(應瑞) 같은 분은 모두 청송당공(靑松堂公)의 유음(遺蔭)으로써 조정(朝廷)에 등현(登顯)하셨다. 지평공(地平公) 경성(慶星) 같은 분은 효우(孝友)와 행의(行誼)로써 저세(著世)하였고, 판교공(判校公) 거원(擧元) 같은 분은 시부(詩賦)로써 원근의 문원(文苑)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 임신세보서(壬申世譜序) 내용 中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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