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시조와상세조

수성시조와상세조

도미부인

수성시조(受姓始祖)와 상세조(上世祖)


우리나라 성(姓)은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한 뒤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도 주로 왕실의 성이 쓰였으며 삼국시대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다.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무역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인들은 신라 말까지 성을 쓰지 않았다. 고려에 들어와서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9년(1055년) 이후에는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민중도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그래서 우리나라 각성의 세보를 보면 대게 고려 중엽부터 조선 초기의 인물을 일세조(一世祖)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 성주도씨(星州都氏) 세보(世譜)에는 대략 고려 19대 명종(1170년 ~ 1197년) 연대에서 23대 고종(1214년 ~ 1260년) 연대로 추정되는 순(順)자를 일세조로 모시며, 그 전대는 대수 미상의 상세조로 기재하고 있다.


계(稽, B.C 110) → 양(襄) → 조(祖, B.C 20~17) → 미(彌, A.D 158~166) → 유(儒, A.D 649) → 진(陳, A.D 918) → 순(順, A.D 1170~1260)

• 계(稽) : 우리 성주도씨의 수성시조(受姓始祖)이다. 사기열전에 기록한 것을 보면 남월나라의 재상 여가와 남월의 왕 건덕이 함께 한나라 황제를 거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원정5년(B.C 112년)에 위위의 벼슬에 있던 노박덕을 복파장군으로 삼아 계양하의 회수해 나가고, 주작도위 양복을 누선장군으로 삼아 예장하의 횡포에 나가 남월을 치게 하였다. 원정6년(B.C 113년)에 월인이 모두 항복하였다.이때에 여가와 건덕왕이 도망함에 교위사마 소흥과 양복 등은 달아난 건덕을 잡은 공으로 해상후 월랑으로 봉하고 도계(都稽)께서는 여가를 잡은 공으로 임채후(臨蔡侯)에 봉하였다.역사상 처음으로 기록된 도씨 성이므로 수성시조로 삼았다.

• 양(襄) : 도계(都稽)의 아들로 임채후(任蔡侯)로 대를 이었다.

• 조(祖) : 한성제(漢成帝) 홍가시(B.C 20~17년)에 장안으로부터 고구려로 와서 옥지, 구주, 도저 세사람이 졸본에 이르러 태자 유리왕을 도와 정국치민(正國治民)한 공이 있었다.

• 미(彌) : 동사열전, 동국통감, 삼국사기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백제 개루왕 때 사람으로 신분은 구구하여 잘 알수는 없으나 당시 백제의 정승이란 고관이거나 귀족이었을 것으로 알며, 추측컨대 대수로는 계(稽)자 선조의 7~8대 손으로 추정된다.

동사열전에는 백제 개루왕을 보좌하였는데 왕이 미(彌)의 부인의 용색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미(彌)를 불러 이르기를 “부인의 덕이 정결 함이 중요하지마는 으슥한 무인지경에서 교묘히 유혹하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적다.”고 하니 미(彌)가 대답하여 이르기를 “사람의 생각은 헤아릴 수 없지마는 신의 처 같으면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두 마음이 없으리라” 하였다.

왕이 이를 시험하고자 미를 궁궐에 머물게 하고서 신하로 하여금 왕으로 변장시키어 그의 집에 가서 미(彌)의 처에게 이르기를 내가 그의 남편과 내기를 하여 너를 얻었으니 함께 동침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부인은 “임금님이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하고 잠시 머무르게 한 후 몸종을 대신 들어가게 하였다. 후일 왕이 속은 것을 알고 대노하여 도미에게 죄를 주어 두 눈을 뽑아 작은 배에 실어 감물에 띄웠다.

다시 그의 처를 불러 강제로 가까이 하게 하니, 미의 처가 이르기를“이제 남편이 죽었으니 어찌 임금을 섬기지 않겠습니까? 마는 마침 월사(월경) 중이라 타일에 목욕재계하고, 모시겠습니다.”하고 속인 후 궁궐을 빠져나와 강가에 와서 호천통곡(號天痛哭)을 하였다. 마침내 하늘이 감동하였는지 조각배가 다가오는지라. 그 배를 타고 천성도에 이르러 남편과 해후 하였다고 한다.

미(彌)의 묘소가 진해시 청안동(경남 웅천) 해변의 산록에 있었으나, 묘역이 임해공단 개발지역에 편입되어 부득이 그 체혼을 포항시 송라면 성주도씨 종산(宗山)에 토감(土坎, 임시 묘를 일컬음) 하였다가 도미부인의 출생지이며 부부가 수난 전까지 살아 온 곳 천성도(현,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새 묘역을 조성해 서기 2003년 6월 10일 합부(合祔)로 이장하였다.

보령시에서는 묘역에 도미부인 정절사(貞節祠)을 세우고 비문을 세워 매년 9월말 ~ 10월초에 정절(貞節)을 기리는 추모제(追慕祭)를 보령시 부녀회 주관으로 거행하고 있다.



2013년 9월 도미부인 정절사(貞節祠)에서 기념 촬영
( 이시우 보령시장, 보령시부녀회 회원들과 함께 )


• 유(儒) : 공은 신라의 김유신과 함께 진덕왕을 보좌하였으며 진덕왕 3년에 좌장으로 갈령현에 나가 싸워 백제의 정복을 살해하고 크게 승리하여 문무왕 8년에는 상천후에 봉하였다.

• 진(陳) : 고려 태조를 보좌한 공으로 칠곡부원군(七谷府院君 또는 星山府院君)으로 봉하였으며 식채(食埰) 800경을 내렸다. 묘는 함양 향교 근처에 있으며, 세상에 전하기를 그 일동을 도부원군(都府院君) 육동(夌洞)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 순(順) : 성주도씨(星州都氏) 기세조(起世祖), 즉 1세조이며 고려조로 추정되고 벼슬은 전리상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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